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관동팔경뿐만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시문과 그림이 창작된 문화공간을 찾는 여정을 기록한 책이 나왔다. 오랫동안 한문학을 공부하고 한시를 바탕으로 강원도 각 지역의 인문기행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던 문학박사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의 <관동 800리 인문기행>(도서출판 산책)이다.
저자는 책 머리말에 이 책을 펴낸 연유를 언급해 놓았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 리의 방면을 맡기시니…”로 시작되는 정철의 ‘관동별곡’에 등장하는 주 배경이 동해안지역이고, 그 중 관동팔경이 대표적 경관이다. 그러나 저자는 “팔경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동해안 일대 수많은 문화공간이 소외되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팔경 사이사이에 시문과 그림이 창작된 공간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잊혀진 또는 잊혀져가는 공간의 의미를 되살려보고 싶었다.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동해안 곳곳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가 바위는 이름 없는 바위가 아니었다. 호수도 또한 시문의 향기가 배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명소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관동팔경과 행정구역을 고려해 고성, 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 울진으로 나누어 서술했고, 시문이 창작되고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문화적 공간과 의미를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북한의 총석정 권역과 삼일포 권역은 평화로운 왕래와 통일 이후를 기대하며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책의 문화공간은 고성의 화진포에서 시작해 울진의 망사정으로 맺는다. 고성지역은 화진포를 비롯해 선유담, 능파대, 천학정, 청간정, 만경대를 담았다. 속초지역은 영랑호와 청초호, 두 곳이 나온다. 양양지역은 낙산사부터 이화정, 의상대, 홍련암, 동해신묘, 하조대, 동산리, 죽도까지 기록했다. 각 문화공간마다 그 특징을 제목으로 달아놓았다. 가령 화진포는 ‘맑고 넓으며 깊숙하고 그윽한 아름다움’, 청초호는 ‘용이 밭을 갈다’, 홍련암은 ‘붉은 연꽃 위 관음보살을 친견하다’는 식이다.
<관동 800리 인문기행>에서는 역사의 현장에 새겨진 옛이야기뿐 아니라 저자가 직접 발로 뛰며 느낀 감정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해당화 꽃이 지천으로 피어 꽃 피는 나루라는 화진포” 편에서는 김일성·이기붕·이승만 별장을 이야기한 후 “맑고 넓으며 깊숙하고 그윽한 화진포에서 피비린내 나는 정치의 폐해와 권력을 생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라고 읊조린다.
사라져가는 공간을 찾아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공간을 찾아 의미를 다시 음미하기도 한다. 선인들이 ‘그윽하고 한가하며 얌전하고 고운 것이 규방의 처자 같고, 밖으론 어둡고 안으로 밝은 것이 덕을 숨긴 어진 선비 같다’고 평한 선유담은 육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회복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일출뿐만 아니라 달구경이 으뜸인 낙산사의 이화정도 시문 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가슴 아파했다. 양양 낙산사 옆에 동해신묘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고 묻기도 한다.
<관동 800리 인문기행>에서는 무엇보다 한시에 그려진 동해안의 뛰어난 풍경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저자 권혁진 박사는 앞서 <김시습 호탕하게 유람하다>, <설악인문기행 1·2>, <강원의 산하 선비와 걷다>, <춘천화첩기행> <조선 선비, 설악에 들다>, <춘주열전 1·2> 등을 펴내 이미 친숙한 독자들이 많다. 292쪽. 1만5천원.
장재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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