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를 떠난 지 8 개월 남짓 되었다. 유년 시절의 고향 진해(현, 창원시 진해구)로 51년 2개월 만에 귀향…. 분명히 진해에 와 있는데, 내 몸은 아직 속초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속초라는 도시는 별로 그립지가 않다. 속초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만 생각날 뿐.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현실 속의 속초는 지워지고, 추억 속의 속초만 남게 될 것 같다. 왜일까?
극작가 이반 선생의 기고문 ‘속초로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다’(2017년 6월28일자, 본보 22면)를 심각하게 읽었다. 마치 변심한 애인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속초…. 내가 사는 동안에도 속초는 워낙 많이 변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개발이니 뭐니 해서 변해가는 곳은 비단 속초뿐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속초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사람으로 치면 성형 수술을 하도 많이 해서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더 큰 성형 수술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러다가 속초가 선풍기 아줌마 같은 흉측한 모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가슴을 짓누른다.
내가 속초 땅을 처음 밟았던 때는 초등 2년생이던 1965년 7월이었다. 속초에 대한 첫인상은 누추함과 무질서함이었다. 약 100 년 전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한국 최초의 근대 계획도시 진해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당시 속초의 공식 차도(車道)는, 해안선을 따라 뱀장어처럼 길게 이어진 2차선 7번국도 하나뿐이었다. 미로와 같은 동네 골목길가에 아무렇게나 다닥다닥 붙어 있던 ‘루핑집’들…. 제멋대로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도시, 진해에서 온 아이 눈에는 무척 낯선 모습이었다. 호롱불이라는 것도 속초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 호롱불이 있는 루핑집에서 우리 가족들의 속초 생활이 시작되었다.(당시 속초는,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번화한 동네에만 전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속초에서 첫날에 마셨던 동네 우물물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시원하고 단 물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동네 곳곳에 널려있던 오징어들…. 당시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속초만큼 경기가 좋은 곳도 없었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당시의 속초는 누추한 겉모습에 비해 매우 건강하고, 실속 있는 도시였었다. 바다에서는 철따라 각종 생선들이 잡혔고, 시내 아무 데서나 볼 수 있었던 청대산과 설악산은 싱싱한 정기가 넘쳐흘렀다. 영랑호에는 내가 좋아했던 왕잠자리 떼로 가득했고, 호수 바닥은 흙 반 재첩 반이었다.
이렇게 누추했지만 건강했던 속초가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변화가 긍정적인 형태의 변화였었다. 그 때는 속초가 좀 변해야 했다. 비좁고 불규칙한 도로 정비도 필요했고, 제대로 된 새 건물도 들어서야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속초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수산 도시에서 관광 도시로 바뀌고, 외부 자본이 본격적으로 밀려들어 오면서부터였다. 그 무렵부터 속초는 점점 탐욕스럽고, 급격하게 바뀌기기 시작했다. 속초의 자연 환경과 역사, 그리고 추억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실향민들의 수많은 애환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던 청호동은 두 동강이 났고, 천혜의 미항(美港)이었던 대포항은 인공 호수처럼 되었다. 속초의 상징이 될 만한 옛 건물도, 추억의 골목길들도 거의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 때부터 속초는 내게서 점점 더 멀어졌다. 그리고 진해에 대한 향수병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를 키워주고 철들게 해준 현실 속의 고향 속초…. 그래서 웬만하면 속초에서 여생을 마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갈수록 낯설어지는 속초는 나의 등을 자꾸 떠밀었다.
물론 진해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속초에 비하면 변했다고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진해에는 7080시대의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마치 현대역사 드라마세트장 같다. 그리고 100 년 안팎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 건축물들은 문화재로 관리·보존되고 있다. 해마다 군항제가 치러지고 있는 진해 구시가지의 구조와 형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래서 유년 시절 나의 주요 동선(動線)-등하굣길, 놀던 골목길 등등의 답사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진해는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진해의 시간은 속초보다 2-3배 정도 더 느린 것 같다.
진해는 속초보다 물가도 많이 싸다.(속초의 물가가 그렇게 비싼지 속초에 살 때는 잘 몰랐었다.)
속초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계속 변해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부패한 정권을 교체했던 촛불 혁명…. 속초시민들은 이런 혁명의 정신을 발휘해서라도 위기의 속초를 구해내야 한다.
‘예레미야 애가(哀歌)’가 ‘속초 애가’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임수철
작곡가·전 한국음악협회속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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