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말 황상기 대표는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했던 사람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사람은 딸 유미 씨와 동갑으로 2004년 말에 삼성전자에서 일을 시작해 입사 32개월 만인 2007년 가을에 급성골수성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화학물질과 방사선 장비를 이용해 반도체 검사 업무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어머니는 이전에 이 사례가 반올림에 제보된 이후 반올림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바 있었다.
황 대표가 속초에서 첫차를 타고 환자가 있는 서울성모병원에 도착하니 병실 주위에는 삼성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황 대표는 삼성 직원들을 보자 항의를 해서 병실 주변에서 멀리 쫓아냈다.
돈으로 매수하는 삼성 행태에 분노
황 대표가 환자의 병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환자를 보고 나온 이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황 대표가 병실로 들어서자 환자는 막 숨을 거둔 직후였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은 이전에 만났을 때 봤던 것과는 달리 얼굴이 심하게 망가진 채로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황 대표도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 병실 밖으로 나와 보니 삼성 관계자들은 다시 병실 주변으로 와 있었고 또 다른 피해자의 한 유족은 그들에게 항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환자가 숨진 후 황 대표는 망자의 어머니를 위로했고, “힘들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반올림과 함께하자”고 권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가족 중 다른 한 사람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기로 했다고 말하며 자신들을 방해하지 말라고 황 대표에게 면박을 줬다. 황 대표는 그 가족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삼성의 돈을 받기 위해 나머지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모습에 크게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삼성의 행태에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황 대표는 장례식장 앞에 있던 삼성전자 사장 명의의 화환을 박살내버렸다. 삼성의 직원들이 장례식장에 와서 밥을 먹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회찬 의원 등 각계에서 조문을 왔지만 황 대표는 출상까지 지키지 못하고 화가 난 채로 속초로 돌아왔다. 황 대표는 현장에 없었지만 경찰은 빈소가 차려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입구에 상주하며 반올림 관계자들의 움직임을 살폈고 발인이 있던 날에는 팻말을 들고 삼성 강남사옥 앞에 선 반올림 활동가 7명을 연행했다.
딸 유미 씨의 장례식에 왔던 삼성전자의 부장은 황 대표가 반올림 활동을 하고 난 이후에 몇 년이 지났을 때에도 황 대표를 만나기 위해 속초 자택으로 계속해서 찾아 왔다. 그러나 황 대표는 그 사람과 대화를 이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부장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와 황 대표에게 피해보상을 얘기했어도 황 대표는 그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는 행정소송을 취하하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삼성의 돈을 받으면 삼성이 그러한 요구를 할 것은 자명해 보였다. 부장은 황 대표가 막아도 문을 억지로 밀고 황 대표의 집으로 들어왔고 황 대표가 나가라고 말해도 나가지 않았다. 몸싸움을 해야 겨우 내쫓을 수 있었다. 가지고 온 과일바구니는 바닥에 던져 버렸지만 그 부장은 다음에 또 속초로 찾아와 황 대표 부부 앞에 얼굴을 디밀었다. 그런 모습에 황 대표는 더욱 질릴 수밖에 없었다.
산재 불승인 취소 1심 판결
행정소송 1심의 마지막 공판에서는 황 대표가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써 가서 읽었다. 황 대표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유독한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그 물질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는 삼성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리고 딸 유미 씨와 같은 조로 함께 일하던 동료마저 유미 씨와 동일한 병으로 숨졌고 이 외에도 제보가 많아 삼성이 직업병을 부인하기 힘든 점을 짚었다. 그런데 딸 이야기가 나오자 감정에 북받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재판정 안은 작은 소리 하나 없이 쥐 죽은 듯 매우 고요해졌다. 황 대표는 자신의 말을 마무리하며 재판장의 현명한 판단을 간곡하게 호소했다.
2011년 6월23일, 1심 선고에서는 황 대표 등의 원고가 일부 승소했다. 재판부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벤젠, 전리방사선, 포름알데히드, 아르신 가스 같은 유해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고 지속적으로 피해자들이 노출된 것으로 판단해 황 대표 등 2명의 유가족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을 취소했다. 비로소 유미 씨의 병이 산재로 인정받은 것이다. 반면 행정소송에 참여한 5명 중 나머지 3명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증거 불충분의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판사가 선고를 마치고 다른 이들이 법정에서 빠져 나간 후 황 대표는 판사에게 다가가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기자들이 황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황 대표와 반올림 관계자들은 기자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고 즉석에서 회의를 진행한 후 황 대표는 기자들에게 공식적인 소감을 밝혔다. 행정소송에 참여했던 모두가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점은 안타까웠지만 유미 씨는 산재로 인정받아 황 대표 개인으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 대표의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하고 또 다른 장벽을 마주했다. 근로복지공단은 1심의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다음에 계속>
구술 황상기 반올림 대표
정리 이광호 객원기자 campin@hanmail.net
2011년 7월 6일, 근로복지공단을 찾아 근로복지공단이 행정소송 1심 결과에 항소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황상기 대표.(사진=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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