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가 높은 날이었다. 해녀복을 입은 한 할머니가 바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오늘은 글렀다”며 돌아서는 할머니의 뒷모습,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올해로 88세인 할머니는 여전히 해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19살 꽃 같은 나이에 시작한 해녀라는 직업을 70년째 이어왔으니, 최장수 해녀라는 수식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고성군 죽왕면 가진읍에 살고 있는 김순금 할머니의 고향은 제주도다. 할머니 세대에 제주도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여자들은 해녀의 삶을 운명으로 여겼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가 굳이 고성에까지 오게 된 데는 어머니의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주도엔 남자가 귀해 혼기가 찬 처녀들도 짝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넌 뭍으로 가서 좋은 짝을 만나 어미처럼 살지 말라”는 어머니의 권유로 고향 제주를 떠나 고성까지 오게 됐다.
할 줄 아는 건 ‘물질’이 전부
운명이란 것이 쉽게 바뀌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물질뿐이었고, 다른 기술을 배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다.
마침 고성에 미역채집을 위해 해녀들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스물한 살에 할머니는 연 닿는 곳 하나 없는 고성 가진읍에 들어와 해녀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녀로 살다 동갑내기 남편도 만났고 슬하에 1남 2녀의 자녀도 두게 되었다. 다들 가난하고 힘든 시절에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자니 해녀의 삶에 쉼표는 없었다.
그렇게 지나온 70년의 해녀 인생, 속을 알 수 없는 바다와 홀로 싸우며 죽을 고비도 셀 수 없이 넘겼고, 이 지겨운 물질을 언제나 끝낼 수 있을지 바다만 봐도 멀미가 나던 때도 있었다.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두 노인네 먹고 살만하다 싶을 때쯤 또 고비가 찾아왔다. 평소에 건강만큼은 자신했던 남편이 췌장암으로 먼저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그게 꼭 10년 전의 일이다. 할머니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그 허전함을 견디기 위해 일부러 몸을 혹사했다고 한다.
여든여덟의 나이에 아픈 곳 하나 없다 하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프다가도 바다에만 들어가면 말짱해진다니 타고난 팔자는 거스를 수 없는 모양이다.
“이 나이에 이만한 일자리 있냐”
요즘은 홍합 채집이 한창이라 바다만 잔잔하면 3∼4시간씩 물질을 한다.
많은 날에는 30만원 가까이 벌이가 되니, 지금 이 나이에 이만한 일자리가 어디 있냐며 웃는다.
하지만 할머니가 일을 쉬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다. 방송국 PD까지 했던 아들이 사업 실패 후 어려운 처지에 놓여 할머니는 그 아들을 위해 지금도 억척스럽게 일을 하고 있는 거다. 딸들은 “나이를 생각해서 이제 그만 쉬라고, 엄마가 그 나이에 바다에 들어가 일을 하는데, 우리 마음이 편하겠냐”며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언제 가도 그만인 인생인데 나 먹고살고, 하나뿐인 아들한테 그래도 도움이 되는 엄마인 게 살아가는 유일한 낙이라는 말에는 딱히 무어라 토를 달 수 없었다.
“하나님 나 이제 갈래요”
차디찬 바닷물에 몸을 맡긴 채 긴 숨을 참아가며 물속 세상과 씨름을 하다 보면 절로 드는 기도가 있단다.
“하나님 나 이제 갈래요.”
최장수 해녀 김순금 할머니의 기도는 ‘더 오래 살게 해주세요’가 아닌 ‘그만 살고 싶다’였다.
물질을 쉬는 날에는 시니어클럽 용역사업에 참여해 쓰레기를 줍느라 허리 펼 새 없었다. 잔뜩 굽은 허리엔 복대를 차고, 절로 가빠진 숨을 고르느라 뱉어내는 한숨 끝에 기도는 늘 그랬을지 모른다.
엄마이기에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해녀 일을 놓지 못하는 김순금 할머니, ‘나처럼 살지 말라’던 엄마의 말을 들어 줄 수 없었던 어느 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김미영 기자 nurugo@hanmail.net
해녀 김금순 할머니가 잠수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김금순 할머니가 채망에 가득 담아 건져 올린 홍합을 손질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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