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끝났다. 비로소 가을비가 쏟아지는 것을 알았다. 처마 앞에 까치가 지저귀니 좋은 벗이라도 오려나, 술 한 잔 받아 놓고 기다려 보리라.”(書了始知秋雨之覆盆不知時詹前有鵲語報喜知有好友來沾酒待之).
양양 출신으로 우리나라 한문서예의 대가로 손꼽히는 길마 이상서 작가가 30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서·행서·예서·전서ㅍ초서 등 한문 5체를 27년 만에 자신의 글씨체로 완성한 후 초서병풍 <서후여묵>에 남긴 유명한 글이다.
한국화단의 중진인 작가는 한국화와 완성도 높은 한문 5체를 특유의 막힘없이 개성 넘치는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병풍 작품으로 탄생시키며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예술영역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평소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상서 작가는 한문서예의 독창적인 자기언어에 자신을 낮추며 남을 배려하는 동양적 사유 그리고 병풍이라는 고유 양식의 차별성을 적절하게 접목시키며 동양예술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27년 동안 묵묵히 한문 5체를 병풍에 담은 것이 바로 ‘이상서 병풍’이다. 장방형으로 짠 나무틀에 종이를 바르고 종이·비단·삼베 등에 그림·글씨·자수 등을 붙여 폭과 폭은 돌쩌귀로 연결해 만드는 병풍에 이상서 작가는 자신의 혼을 담아 한문 5체를 한자 한자 정성껏 써내려갔다.
그에게는 3명의 스승이 있다. 70년대 우리나라 현대 수묵화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남천 고 송수남 교수(전 홍익대학교 한국화), 마음으로 작가를 품어준 유산 고 남경갑 교수(전 대한민국 예술원 원장), 오용길 교수(전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가 현재의 그를 이끌어줬다.
“늘 세 분의 선생님께 부끄러운 제자가 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게 예술인가 싶다.”
아름다운 고향, 양양은 캔버스
양양 손양면 주리(일명 배말)가 고향인 이상서 작가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기를 좋아했다. 남대천 제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미술 선생님이 화가가 되라고 할 정도로 그의 솜씨는 타고났고, 초등학교 시절 붓글씨를 쓰고 있으면 선친이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붓을 잡으면 즐거웠고 참 행복했으며,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신 아버지가 나의 참 스승이 아니었나 싶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9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작가는 양양중학교 3학년 때 부친이 많은 토지를 이웃들에게 저렴하게 팔고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서울로 가기 싫어 혼자 고향인 양양에 남아 자취를 하며 양양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를 입학했다.
돌이켜보면, 남대천과 설악산, 오색단풍 등 수려한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고향, 양양은 어쩌면 그에게는 캔버스였고, 작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신을 한국화가로 이끈 원동력도 바로 수려한 산천에서 자라게 해준 고향이며, 고교 시설 미술 선생님의 진로 조언도 삶의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홍익대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은 그는 설악산과 오색령 등 고향은 물론 전국 각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화폭에 담아내며 한국화가로서 역량을 쌓아갔다.
작가는 스승들로부터 사사받은 수묵담채의 기법으로 아름다운 강산을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승화시켰고, 역동적인 20대를 보내던 그의 뇌리에는 어려서부터 항상 관심을 갖고 써오던 한문과 한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20대부터 5체를 더 공부하겠다고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작가는 30대에 이르러 매일 새벽마다 두 시간씩 5체를 연마했고, 그때부터 병풍에 한문을 쓰는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됐다.
지난 27년 동안 갈고 닦은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훈독해서 천자문 병풍>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대표작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금강산 삼선암’ ‘오색령 추색’ ‘월유봉 추색’ ‘설악산 일주문’ 등 대표적인 한국화도 그려내며 한국화단의 중진으로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쌓아왔다.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현대미술도 전공한 이상서 작가는 1998년 갤러리 회화제를 비롯해 2002년 대작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스 초대전, 일본 초청 개인전, 꿈 몽유도원전, 중국·대만 초대전 등 40여회에 이르는 개인·단체전을 개최하며 자신의 역량을 선보였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3회와 최우수상 수상, 신라서예대상전 대상, 경기도 미술공로상, 제12회 대한민국 미술인상 미술공로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우리나라 한국화와 서예분야에서 큰 획을 긋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향과 부인·지인들 큰 힘 돼
화단의 대가로 자리매김한 그에게는 자신을 키우고 이끌어준 고향의 아름다운 강산이 늘 가슴 한 구석에 자리했고 어려서 함께 했던 그리운 얼굴들이 멍울져 있었다.
이상서 작가는 꿈에서도 그립다는 고향을 연어가 다시 오르듯 지난해 처음으로 양양군 초대 이상서 병풍전을 열어 고향 주민들에게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자신의 예술세계를 선보여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지난해 장기간 연 초대 병풍전에서 작가는 어려서 함께 남대천 개울에서 멱을 감던 친구부터 정관계 인사들까지 정겹게 맞이하며 겸손한 자세로 작품을 해설해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늘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김천수 강원도민회장과 윤명식 전 KBS JAPAN 사장, 이두순 양양군통합사회단체협의회장 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곤 한다.
현재 작가를 있게 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부인 한춘희 여사다. 서양화가이자 서울시교육청 장학관으로 퇴직한 부인은 늘 남편인 작가를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작품 활동을 응원했다. 27년 동안 매일 새벽에 두 시간씩 5체를 연구하는 수행을 하거나, 작품 소재를 찾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떠날 때면 부인은 애타는 마음으로 작가의 좋은 작품 완성을 기도했다.
이상서 작가는 “늘 어떻게 하면, 내가 본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어떻게 하면, 바른 한문 5체로 보는 이들에게 세상의 올바른 이치를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해온 것 같다”며 “인생을 살면서 어디 끝이 있겠냐마는 모든 것이 다 소진될 때까지 더 좋은 마음으로 좋은 작품을 그리고 써, 모든 이들에게 선함과 자애로움을 전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대한민국 국전작가회 정회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길마 이상서 작가는 경자년 새해를 맞아 오늘도 길마산방에서 먹을 가는 것으로 고요한 새벽을 열어젖힌 후 해가 중천에 뜬지도 모를 정도로 제2회 양양군 병풍전에 전시할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다.
김주현 기자 joo69523@hanmail.net
이성서 작가.
길마 이상서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천자문 병풍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서 작가가 양양읍 전경을 한국화로 담아낸 작품을 양양군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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