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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옹의 비극적 가족사 - 간성읍 장신리 1934년생 강환철 옹<상>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특집 /자신은 미군, 형들은 인민군…전쟁 후 다시 만나지 못해
등록날짜 [ 2020년06월29일 10시55분 ]

6.25 한국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전쟁을 둘러싼 국제관계, 그리고 이에서 파생된 체제와 관행 등은 우리 사회를 규율하고 있고 미시적으로는 개인의 굴레가 되거나 한 가족에게 치유하기 힘든 아픔으로 남아 있다.
1934년생으로 아흔이 가까운 간성읍 장신리 강환철 옹은 사형제 중 막내인데 6.25로 인해 형님 세 명과 이별해 생사를 모르게 됐다. 그의 부친과 숙부는 전쟁 중에 대구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강 옹은 한국전쟁시 미군이었고 이후 30여 년의 세월을 국군으로 복무했다. 그의 세 형 중 두 명은 인민군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조선노동당 당원이었다.

남달랐던 조부
이 가족의 비극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성읍 장신리는 예로부터 진주 강씨 집성촌이었다. 강 옹의 가계는 이 마을에서 대토지를 소유하고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강 옹은 어린 시절 보릿고개의 어려움을 모르고 살 정도로 집이 부유했다고 말했다. 당시, 많은 이들이 보릿고개가 오면 칡뿌리를 캐 먹고는 했지만, 강 옹은 그런 일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집은 부유했어도 하인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조부에게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조부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지는 않았어도 건봉사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모여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하는 계몽 활동을 이어나갔다.
조부 때부터 마을 소작인들을 대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조부는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받지 않았고 소작인들이 농작지에서 일정 기간 일해 주는 것으로 소작료를 대신하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 옹의 모친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하러 모인 소작인들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모친도 그들과 함께 일해야 했다. 반면 그의 부친은 펜대를 굴리며 장부를 정리하는 일을 주로 할 뿐 농사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강 옹의 기억에 따르면 장부를 정리하는 일도 적지 않아서 부친이 농사에 직접 나서지 못했다.
모친의 어려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강 옹은 조모가 모친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키는 바람에 모친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강 옹의 모친은 “너희 할머니가 죽고 일주일만 더 살다 죽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당시 어린 강 옹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제강점기가 막바지를 향해 가기 몇 해 전에 강 옹의 큰형은 일제의 징병을 피해 마을을 떠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의식을 가진 조부를 둔 집안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순순히 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큰형이 떠난 후 일제의 관리들이 형이 집에 있는지 확인을 하려고 이따금 들이닥치곤 했다.
큰형이 마을을 떠난 후 한 달쯤 후 한 밤중에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그는 문밖에서 큰형의 이름을 댔다. 알고 보니 사연은 이랬다. 큰형은 마을을 떠난 후 만주로 갔고 거기에서 김일성 예하의 항일무장투쟁조직에 가담했다. 집을 찾아온 이는 그 부대의 일원으로서 군자금을 요청했고 강 옹의 집에서는 이에 응했다.
큰형은 조국이 해방된 직후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큰형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토지개혁이 진행됐다. 당시 고성군은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이라 북한에 속해 있었다. 강 옹의 집안은 대토지를 소유했기에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토지개혁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큰형이 해방 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덕분에 이때 강 옹의 집안은 아오지 탄광행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 이후 강 옹의 집안사람들은 조선노동당을 향한 충성심이 깊어졌다.
어린 시절 강 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정의로운 나라로 여겼고 대한민국을 미국의 허수아비라 생각했다. 당시 북한 신문에서는 이승만을 ‘미제의 앞잡이’로 표현했고 학교에서는 남한 정권을 인민의 고혈을 빼먹는 정권이라고 가르쳤다. 강 옹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북한 정권을 정의롭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 명씩 떠나간 형들
장신리 진주 강씨 집성촌의 종손인 큰형은 해방 이후 거진읍 자산리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후 금강산 산림관리인이 됐고 이후 6.25 발발 2년 전에 고성을 떠나 원산으로 갔다.
네 살 위인 강 옹의 셋째 형은 6.25가 발발하기 2년 전에 인민군에 자원입대하며 집을 떠났다. 강 옹은 셋째 형이 집을 떠나던 날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셋째 형은 입대하던 날 아침 강 옹과 함께 등교할 때까지도 자신의 입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강 옹은 등교 후 인민군 입대자들을 환송하기 위해 간성역으로 가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도열하고 있을 때 셋째 형을 마지막으로 봤다. 군용차량이 입영열차에 오르는 입대자들을 역으로 싣고 와서 섰는데 거기에서 형이 내렸다. 그는 그때 형을 보고서는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담임교사와 친구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형이 입대한 사실을 부모님께 알렸다.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강 옹의 둘째 형은 6.25가 발발하기 보름 전쯤 인민군으로 징집됐다. 둘째 형도 입대 이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전쟁 발발 1주일 전쯤 이상한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민군의 탱크와 군대가 마을 인근을 지나 남하했고 간성역에는 군대 보급물자와 기름이 쌓여 있었다. 학교 운동장은 빨간 계급장을 단 인민군 정규군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 자신이 본 탱크들은 자그마한 종류였지만 당시 중학생이던 강 옹의 눈에는 탱크가 너무도 거대해 보였고 어린 마음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즈음 셋째 형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셋째 형은 편지에서 곧 조국이 통일될 거라고 밝혔고, 그 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셋째 형이 보낸 편지에는 인민군 부대의 주소가 숫자로만 기록돼 있어 편지만으로는 셋째 형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편지가 셋째 형의 마지막 연락이 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한 후 육상에서는 북한군의 진격이 매섭게 이어졌지만, 공중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미군은 전쟁이 발발한 지 10일도 안 된 시점인 7월 초부터 북한의 주요 항구도시이자 철도 요충지, 그리고 정유시설까지 있던 원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원산 폭격은 군사시설이나 기간시설 파괴뿐만 아니라 막대한 민간인 피해도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원산에 있던 강 옹의 큰형은 고향으로 피신을 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큰형은 고향을 떠났고 이후 강 옹은 다시는 큰형을 만나지 못했다.
 <계속>
이광호 기자 campin@hanmail.net
간성읍 장신리 강환철 옹. 1934년생이다.
 

이광호 (campin@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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