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환철 옹은 고성군 장신리에 미군 폭격이 시작된 날을 잘 기억하고 있다. 미군의 원산폭격을 피해 큰형이 고향에 돌아와 있던 1950년 7월 중순 어느 날, 새벽에 비행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엔 한 대였는데 5분쯤 후 비행기는 4대로 늘어났고 느닷없이 폭격이 시작됐다. 전쟁 발발 이후 장신리에는 인민군들이 주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날도 인민군이 장신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폭격은 이후에도 계속됐고 장신리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돼버렸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마을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대구형무소에서 숨진 부친과 숙부
1951년 3월 어느 날 국군이 한밤에 강 옹의 집을 둘러쌌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숙부를 체포했다. 이는 이웃 마을 주민이 국군에 강 옹의 집안을 ‘빨갱이’라고 고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몇 해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강 옹이 사는 진주 강씨 집성촌에서 이웃 마을로 강씨 여인이 시집을 갔는데, 그 시댁에서 강씨 집성촌의 종손인 강 옹의 부친에게 땅을 더 부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었다. 강 옹의 부친은 이 요구를 거절했고, 그 과정에서 그 사람과 등지게 됐다. 그 사람은 국군이 장신리 인근에 진주한 이후 강 옹의 집안을 빨갱이 집안이라고 고했다. 부친과 숙부는 체포 이후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두 사람은 수감 1년도 안 돼 숨을 거뒀다.
부친과 숙부의 체포 이후 강 옹도 국군에 체포당할 뻔했다. 하지만 강 옹은 양양 손양면으로 도망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거기서 강 옹은 피난 나온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그의 아버지와 숙부가 15년 형을 선고받은 사실을 알게 됐고 강 옹은 너무 화가 나서 인민군으로 입대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피난 온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강 옹은 가치관에 혼란을 겪었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그때까지 정의로운 나라라고 굳게 믿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닐 수도 있고 대한민국이 그리 나쁜 나라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강 옹은 얼마 후 손양면에서 토성면 용촌리로 옮겨 왔다. 거기에는 부산에서 올라온 미군 유류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강 옹은 거기서 드럼통을 나르는 노무자로 일하게 됐다. 그러다가 미군 통역관과 친해지면서 미군 분대 텐트마다 한 명씩 있는 하우스 보이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기존에 하우스 보이로 있던 한 소년이 절도를 저지르면서 해고돼 공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하우스 보이들은 다 부산에서부터 부대를 따라 같이 이동하면서 올라왔기에 결속력이 단단했고 그들은 새롭게 일하게 된 강 옹을 기존 하우스 보이를 쫓아낸 이로 여기고서 괴롭혔다. 하우스 보이들은 강 옹을 자주 구타했고 강 옹은 도망치다가 잡혀서 맞고는 했다. 하지만 강 옹은 독한 마음으로 버텼고 하우스 보이들은 강 옹을 쫓다가 지치고는 했다.
미군이 되다
하우스 보이 생활을 하던 강 옹 앞에 어느 날 중학생 시절 상급생이 옷을 잘 빼입은 채로 나타났다. 그 사람은 “월급을 받고 일하면서 영어도 배울 수 있고 미국에도 갈 수 있는 일터가 있다”면서 강 옹을 부추겼다. 강 옹은 그를 따라 차에 올라 학사평에 위치한 군부대에 도착했다. 그 부대는 부대 표시가 없었고 외곽에는 3중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으며 외등이 철조망을 비추고 있어서 탈출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자신을 데려간 이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고 그 부대의 한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한 사람이 강 옹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나가려고 하면 죽는 곳이야.”
강 옹이 도착한 곳은 미 극동군 사령부 소속 유격전 부대였다. 강 옹은 자신을 부대로 데려온 상급생을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강 옹이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그 사람은 그 부대를 떠나기 위해 강 옹을 포함해 두 사람을 데려오고 그 부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강 옹 외에도 전국에서 여러 사람이 몇 주에 걸쳐 ‘스리쿼터’에 실려 부대로 잡혀 들어 왔다. 인원이 100명 정도 되자 강 옹을 비롯해 부대로 끌려온 이들은 군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총검술을 배웠고 낙하산 훈련도 했고 물치해변에서 상륙작전을 연습했다. 훈련은 매우 고되고 가혹했다. 강 옹은 당시 미군은 훈련할 때 사람을 때리지 않는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강 옹은 다른 훈련병들과 함께 훈련 중 미군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강 옹은 살고 싶단 생각에 탈영하고 싶었지만 3중 철조망이 처진 그곳을 도저히 뚫고 나갈 수는 없었다.
훈련이 끝난 후 강 옹은 ‘미 극동사령부 8140부대 동해안 기동부대 커크랜드 연대 1대대 a중대’ 통신병으로 배치됐다. 조선노동당 당원인 부친과 숙부를 둔 사람이, 두 형님을 인민군으로 둔 사람이, 그리고 국군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민군이 되고자 했던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느새 미군이 됐다. <계속>
이광호 기자 camp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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