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 옥수수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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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 옥수수 밭

등록날짜 [ 2020년07월20일 11시46분 ]

강원도 사람들은 흔히 ‘감자’라고 불린다. 군대에서는 ‘비탈’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했다. ‘감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벼를 심을 수 있는 논이 태부족하고 산악지형이 대부분인 강원도에서 널리 심어지는 작물이 감자인 탓일 테고, ‘비탈’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산비탈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던 강원도 사람들을 다소 비하하는 말로 쓰인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을 수용하기가 사실 어려웠다. 속초는 분명 설악산을 끼고 있고 감자를 심기도 하지만, 시내를 조금 벗어나면 제법 넓은 논에 심은 벼들이 익어가는 모습들을 종종 봐왔고, 군데군데 밭에는 감자보다는 더 다양한 밭작물들이 심겨져 있음을 자주 봐왔기 때문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대도시에 비해서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는 시내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감자’ 또는 ‘비탈’이라고 불릴 때마다 사실 강원도 사람으로서의 일체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동해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다수의 속초사람들과도 달리 어업과 관련된 기억도 거의 없다. 있다면 낚시하러 방파제에 나가서 ‘배드미’나 ‘졸복’ ‘놀래미’ 등을 잡아본 기억이 내겐 어업과 관련된 추억의 전부였다.
귀향을 하게 된 후, 학창시절엔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했던 여러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내 삶이 그리 자연친화적이지 못했고 고향의 여러 정서를 담은 추억이 매우 적었음을 느끼게 된다. 그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보다 농사와 관련된 지식과 경험,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고, 어업과 관련해서도 밤새 조업한 배에서 명태, 오징어 등을 내리고 손질하거나 덕장에 말리는 등 어업에 종사한 부모님을 둔 친구들의 다양하고 특이한 이야기들도 많았다.
그러던 차에 요즘 내게 농사일과 관련된 추억이 하나 생기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전세계적인 팬데믹이 발생하고 있던 올해 3월 말쯤이었다. 새로 이전한 사무실 옆에 약간의 여유 부지가 있었는데 그 여유부지에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우선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그곳을 한 번은 갈아엎어야 했다. 매일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조금씩 땅을 뒤엎었다. 겨울을 막 지나던 때여서 아직 땅은 굳어있었고, 매일 조금씩 하는 일이었어도 농사일을 처음 하는 내게 경작해야 할 땅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렇게 며칠을 하던 중, 사무실 근처에서 하우스 농사를 지으시는 마을 통장님이 지나가면서 답답해보이셨는지 트랙터로 땅을 갈아주셨고 경운기로 골을 내 주셨다. 또한 작년에 파종하고 남았다며 옥수수 종자와 함께 농사짓는 여러 가지 ‘꿀팁’도 알려주셨다. 그렇게 어줍지 않게 생 초보 농부의 옥수수 경작이 시작되었다. 비료를 뿌리고 고랑마다 거리를 두고 군데군데 옥수수 몇 알씩을 심은 밭에서는 신기하게도 작은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이러구러 시간은 흘러 초봄에서 한여름이 되었다. 퇴근하기 전 시간을 내어 때마다 물도 주고 잡초도 뽑고 고랑을 보수하면서 옥수수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게 마치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쁨을 주었다. 모든 기쁨에는 고통의 시간들이 녹아있듯이 병충해가 생기기도 했고 너무 가물어 잎이 말라갈 때도 있었다. 농작물들은 키우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고 했던가. 그럴 때 마다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지금은 내 키보다 훌쩍 더 커진 옥수수들을 틈나는 시간마다 흐뭇한 맘으로 바라보게 된다. 꿀벌들이 집단으로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옥수수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닌다. 슬그머니 수염을 내밀며 점점 더 통통해지고 있는 옥수수들을 보면서 처음 해본 농사의 수확의 시간을 기대하게 된다.
이젠 서울에 있는 친한 친구들에게도 “‘감자’라고 부르지 마라! 차라리 ‘옥수수’라고 불러라~”하고 싶다. 벌써부터 수확한 옥수수를 나눠주고 싶은 이들의 이름들이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도 뭉게뭉게 떠오른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