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광복 75년을 맞았다. 1990년대 초창기 <설악신문>에는 일제강점기를 기억하는 인터뷰 몇 편이 실렸다. 30년 전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산증인들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우리는 75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 시절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
숨겨진 원폭피해자 양양 권태율씨
1990년 6월 11일자 <속초신문> 2호 6면에는 양양에 거주하는 원폭피해자 권태율씨의 삶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양양장 30년 터줏대감으로 부러진 우산살이나 양동이를 때우는 일을 하는 권태율(59세)씨는 1933년 일본 히로시마 담바라에서 출생했다. 부친 권형호씨 고향은 경북 월성군.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45년 8월 6일 혼자 집에서 학교에서 과제물로 내준 종이 글라이더에 날개를 붙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번쩍하는 빛을 보고는 그냥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가슴이며 몸 다리에 피가 흘렀다.
권씨가 살던 이층집 지붕이 내려앉았고, 주변 건물도 대부분 부서졌다. 본인만이 아니라 모친 김학순씨도 전차를 기다리다가 거리에서 피폭을 당했다. 권씨는 학교 임시천막에 설치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시체를 싼 가마니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고 기억한다. 이때 일본에서 내어 준 원폭피해자수첩을 받았으나 귀국 후 6.25 전쟁 중에 분실했다.
해방 후 권태율씨는 일본에서 돌아와 한국전쟁 후에 속초로 왔다. 배멀미가 심해 오징어잡이 배타기를 그만두고, 양양장에서 땜질 일을 30년째 하고 있다. 권씨는 원폭을 당해 심한 출혈을 했는데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지금도 많이 걷지 못하며, 허벅지와 부서진 엉치뼈에 흉터가 남아있다.
기사에서는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한국인 7만명 중 약 4만명이 사망했고, 3만명이 피폭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양양 만세운동과 농민조합운동 앞장선 노병례옹
1994년 3월 21일자와 8월 15일자 <설악신문>에는 양양만세운동의 주역으로 유일한 생존자인 노병례(90세)옹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는 9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만세운동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1시간 이상 열변을 토한다고 했다.
노옹은 15살이 되던 1919년 4월 4일 양양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양양 장날인 4월 4일 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는데, 아침부터 양양읍으로 들어오는 다섯 통로에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는 군중으로 가득 메워졌다. 노옹은 같은 학교 생도인 최선극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구장 노병우와 최명옥의 지도를 받으며 큰 태극기를 들고 장터를 향해 행진했다. 만세군중에 압도당한 일경은 경찰서 안으로 도망쳤다.
만세운동 가담으로 노옹은 퇴학을 당했다. 20세 초반인 1925년 9월에는 함북 무산에서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인 박유덕과 접촉해 망명을 기도했으나 체포되어 1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1년에는 양양농민조합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193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94년 8월 15일 <설악신문> 인터뷰에서 노옹은 “8월 15일만 되면 만세함성이 울려 퍼지던 4월 4일 양양장터와 일제치하에서 겪었던 악몽이 절로 기억된다”며,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1994년 11월 14일 <설악신문>에는 노병례옹의 부고 소식이 실렸다. 11월 5일 문중일로 서울에 간 노병례옹은 대림동 전철역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김성갑옹
1992년 8월 17일 <속초신문>에는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1942년부터 광복군으로 활약한 속초 김성갑(70세)옹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1923년 강원도 옥계에서 태어난 김옹은 1942년 2월 하순 19살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4개월간의 장정 끝에 중국 여순에서 봉천, 산해관을 거쳐 광복군이 있는 서안을 찾아갔다. 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이범석)에 합류한 김옹은 해방을 맞아 1946년 6월 귀국할 때까지 광복군 제2지대에서 첩보부 활동을 펼쳐왔다. 김옹은 “어린 시절 조국광복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침을 주신 김순관 조부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며, “죽기 전에 조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 여생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1995년 3월 6일자 <설악신문>에는 김성갑옹이 1960년대 중반 속초에 정착해 설악산 흔들바위 쪽에서 장사를 해왔다고 보도했다. 김옹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2001년 6월 24일 작고했다. 김옹은 1943년 3월 1일 발간된 “한국광복군소사”와 광복군 차가증과 군용증명서, 대원증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집단소송 제기한 속초 선태수씨
1993년 5월 24일자 <설악신문>에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강원지부장을 맡고 있는 선태수(70세)씨 인터뷰 기사가 게재됐다.
경북 선산이 고향인 선태수씨는 일본 군대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해방을 맞았다. 속초에서 36년간 고물상을 하면서 살아왔다. 선씨는 한 달 전에 영랑동 자택에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강원지부’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고 회원 접수에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유족회는 지난해 9월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 강원도내 회원도 120여명에 이른다. 1991년 유족회 회원 41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오는 6월 7일 3차 공판을 준비하고 있다. 이 공판에는 일본인 변호사 11명이 무료변론을 맡고 있는데, 피해자 대부분이 강원도 사람이다.
기사가 나간 이후 선태수씨는 일제강제연행한국생존자협회 회장을 맡아 2014년에는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일청구권 자금 반환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근로정신대 배상소송 제기한 속초 이종숙씨
1996년 7월 15일자 <설악신문>에는 일본기업을 상대로 근로정신대 배상소송을 제기해 5년째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속초시 교동 이종숙(65세)씨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씨는 근로정신대 피해자 2명과 함께 1992년 9월,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공장인 후지코시(주)를 상대로 미불노임 지불 및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도야마시 지방재판소에서 세 번의 공판이 열렸고, 7월 24일 1심 최종공판을 앞두고 있다.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대문 창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야간중학교를 다니던 이씨는 1944년 6월말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시켜준다며 짐을 싸서 오라는 일본인의 말을 믿고 따라갔다. 근로정신대에 함께 간 아이들은 모두 2백명. 일본에 도착해 한 달 동안 지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14개월 동안 비행기 나사못 등 군수품을 만드는 후지코시공장에서 하루 2교대로 12시간씩 일하며 비참하게 생활했다. 이종숙씨는 배상소송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3차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일본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일제의 침략 만행을 고발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설악신문> 보도 이후 이종숙씨의 소송은 1,2심에서 기각되었다. 그러나 2000년 7월 일본 최고재판소의 화해 권고에 따라 7명의 피해자가 3,500만엔의 합의금을 받아냈다. 일본 기업이 근로정신대 피해 배상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후지코시(주)는 태도를 돌변해 추가 제기된 배상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18년 후인 2018년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근로정신대 피해배상소송에서 손해배상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일제 징용자와 위안부, 50년만의 슬픈 만남
1996년 8월 19일자 <설악신문>에는 광복절 특별취재로 “위안부로 끌려간 동향인 50년만에 만나 보살펴”라는 기사가 실렸다. 속초 동명동에 사는 이영진(74세)씨와 이양화(78세)씨의 이야기. 두 사람은 전북 군산에서 함께 자라며 알던 사이였다. 이영진씨는 17살 때 만주로 가서 수산전문학교를 다니다가 19살 되어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야마시따기선’에 강제로 끌려가 일을 했다. 이양화씨는 고향에서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서울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일본헌병의 꼬임에 넘어가 하얼빈에서 관동군 위안부 노릇을 하게 됐다. 이영진씨가 군수 물자 운반을 위해 하얼빈에 갔다가 우연히 위안부 생활을 하던 이양화씨를 만나게 됐다. 이영진씨는 이양화씨를 구해보려고 했는데, 수송선을 타고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보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고 한다.
광복 후 고향에 돌아온 이영진씨는 결혼 후 가정을 이뤘고 속초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난 1995년 12월 고향 군산을 찾았다가 50년 만에 군산역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혼자 앉아있는 이양화씨를 만나게 됐다. 이양화씨는 위안부 생활로 심신이 망가져 절을 찾아다니며 잔일거리를 하면서 살아왔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영진씨는 이양화씨를 속초 자기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지난 6월에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강원지부장 선태수씨와 이영진의 도움으로 이양화씨는 생계비 지원이 가능한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신청했으며, 주공임대아파트 특별공급도 신청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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