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개인의 기억이 모여 마을의 이야기가 되고, 더 나아가 한편의 지역 향토사를 이룬다. 영북지역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은 일제강점기와 분단과 인공시절, 한국전쟁과 수복이라는 격동기의 역사를 겪어왔다. 인공시절과 전쟁 경험은 대한민국의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르다.
<설악신문>에서는 1993년 10월 18일자부터 1994년 3월 7일까지 총 17회에 거쳐 “우리마을 터줏대감”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어르신들의 구술 이야기를 연재 기사로 실었다. 30년 전 어르신들이 <설악신문>을 통해 전해준 마을 옛이야기는 지금 우리지역 향토사의 소중한 자료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구술내용 중 마을관련 이야기만 모아서 지역별로 재정리했다.
속초 노학동 이호열옹(1993.10.18.)
“송개 뜨던 동네 가산 그리워”
1923년 노학동의 옛 마을인 노리(蘆里)에서 태어난 이호열(69세)옹. 1940년대 말까지도 늪지대에 쑥대(갈대)가 많아 마을 이름이 노리로 불렸다고 한다. 마을에서 태어나 인공 치하 때 월남해 서울에서 보낸 5년을 빼고는 한 번도 노학동을 떠난 적이 없다.
1936년 병자년 수해(포락) 때 견짜구(발동선)가 마을까지 떠내려 왔는데 일본사람들이 물이 빠지자 솔밭에 매어놓은 견짜구를 옮길 도리가 없어 혼쭐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에는 현재 도로인 곳은 온통 늪지대와 개울이었다. 현재 동우대학(현 경동대학) 입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오리나무가 많았는데, 경축년(1937년 정축년인 듯) 봄 태풍에 나무들이 전부 쓸려 내려갔다.
척산온천 자리 웅덩이에서 온천물이 솟아나 누구나 자유롭게 물을 쓸 수 있었는데,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좋아 인근마을에서 많이 찾아왔다.
노리 동네가산은 마을주민 공동재산으로 남벌을 막기 위해 1년 중 가을에 한번 ‘송개뜨는 날’을 정해 솔잎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이 동네 가산이 법적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시유지가 되어 동우대학 재단에 매각되었다고 전했다.
속초 대포동 신재천옹(1993.11.15.)
“36명 풍랑에 몰살당한 아픈 경험”
3대 째 대포동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는 신재천(88세)옹. 1937년까지만 해도 도천면 소재지로 우편소와 학교, 주재소, 금융조합 등 주요기관이 한 곳에 모여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20대 초반 때는 대포 앞바다에서 명태, 정어리, 청어 등이 많이 잡혔다. 정어리는 3곳의 정어리 공장으로 보내져 비누를 만드는 기름을 추출해 일본에 보냈다.
1940년대 고등어잡이를 떠났던 어민 36명이 풍랑에 몰살당해 도천면장이 어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동산에 합동위령비를 세워 추모했는데, 위령비가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대포동에 일본인들의 화장터였음을 알리는 비석도 남아있다. 남포석(화약을 넣어 폭파시켜 만든 돌)으로 만들어진 비 또한 현재의 공동묘지 초입에 우뚝 서 있다.
대포동에 제일 먼저 살기 시작한 사람은 일제 당시 상투 잘리는 걸 피해 척산에 도피해 살던 박기설옹의 6대 선조이며, 이후 장씨와 이씨들도 모여들기 시작해 1백여 가구를 형성했다.
속초 도문동 박세현옹(1993.12.6.)
“가뭄들면 인근 마을과 물싸움”
상도문 박세현(82세)옹은 어린 시절 학무정을 세운 매곡 오윤환 선비에게 직접 한문을 배웠다. 집 근처에 가묘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배례를 드리던 매곡선생의 효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상도문 마을은 인동 장씨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강릉 박씨와 밀양 박씨, 오씨, 김씨 등이 들어와서 부락을 형성했다. 도문동은 옛날에는 강현보와 도문보가 사람인(人)자로 형성되어 있어 가뭄이 심할 때에는 봇물을 서로 대려고 마을 간에 물싸움이 비일비재했다.
상도문 2리는 고종 때 박해를 피해 정착한 천주교인들이 옹기를 구우며 숨어 살아서 옹기마을이라고도 했는데, 해방을 전후해 10년간 활발히 옹기를 구웠다. 지금도 당시 옹기를 굽던 자리가 남아있다.
속초 영랑동 김창원옹(1994.1.17.)
“일제시대 냉면집 요리사로 근무”
김창원(77세)옹은 일제강점기 요릿집이 많았던 영랑동에서 냉면을 만드는 요리사였다. 영랑동은 속초에서 처음으로 장이 서기 시작해 가장 번화한 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상권이 중앙동 쪽으로 형성되다보니 생기 넘치던 장거리 풍경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요즘 냉면에서는 그 옛날 순메밀을 망에다 갈아 체를 쳐서 만들어 먹던 그 맛을 찾아볼 수 없다. 예전 영랑동에는 ‘풍악관’이라는 큰 요리집을 비롯해 동일냉면, 제일냉면이 있었으며, 장거리에는 국밥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당시 영랑동에는 속초에 단 두 개 의료기관인 ‘구세병원’과 ‘철도병원’이 있었다.
수복 직후 ‘밀림극장’이 만들어져 당시 명성을 날리던 가수 고복수, 황금심 부부의 공연이 자주 열리곤 했다. 당시 영랑동에 살던 이들 부부의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극장 안이 미어터질 정도로 관객이 붐볐으며, 장거리도 인파로 붐볐다.
밀림극장에는 그들의 공연뿐만 아니라 유랑극단이 자주 찾아들어 매일 호황을 누렸다. 영랑동은 일제 강점기까지는 장거리와 새짝마을(현 등대 근처 마을)로 불렸으며, 그 후 일구(一區)로, 동제 실시 후에는 영랑동으로 바뀌었다.
속초 장사동 주대현옹(1994.2.7.)
“유달리 인정이 좋은 마을”
장사동은 1973년 7월 고성군 토성면 사진리와 장천리가 속초시로 편입되면서 동리 첫글자를 따서 장사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장사동 주대현(79세)옹은 조선후기까지 사진리 마을은 ‘사야진리’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줄여서 ‘사진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속칭으로 모래기, 나룻모래기라고 한다.
사진리 주민들은 예로부터 반농반어로 생계를 이어왔는데 6.25 전쟁 당시 집이 모두 소실돼 수복 후에는 움막에서 생활해야 했다. 장사동에는 고성군 마차진리에 거주하던 70여 가구가 북한과 인접해 위험하다고 강제이주해와 형성된 마을이 있는데, 더러 타지로 떠나갔지만 아직 당시 이주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옛날에는 모두들 어려웠기에 이웃의 인정으로 살았고, 장사동은 유달리 인정이 좋았다고 한다.
속초 교동 최명복옹(1994.2.28.)
“50년대 초 7가구만 살아”
만천동은 옛날 어느 선인이 마을의 위치를 보고 자리가 좋아 먼 훗날 집의 숫자가 만천호가 넘을 만큼 부유한 동네가 된다는 해서 지어졌다. 최명복(82세)옹은 강릉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해방 후 속초로 와서 만천동에 자리잡아 50년간 살아왔다. 일제강점기 때인 20대 초반 하얀 목장갑을 끼고 조수 한 명을 거느린 목탄차 운전수였다. 목탄차는 지금의 화물차와 같아 속초의 생선을 한 차 가득 싣고 서울, 춘천, 강릉 등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8년간 하던 운전을 전쟁과 더불어 끝내고 4마력짜리 탈곡기인 ‘얀마’를 가지고 집집마다 방아 찧어 주는 일을 했다. 하루 도정료는 쌀 열세 말 정도. 당시 돈벌이로는 많은 액수였다.
처음 만천동에 살기 시작할 때는 7가구 정도만 살았는데, 7번국도 주변은 갈대가 무성한 버덩으로 중앙동과 통하는 길이 없어 조양동, 청호동을 거쳐 중앙시장을 다녔다. 겨울에 청초호가 꽁꽁 얼면 인근 마을 주민들이 썰매를 타고 건너와 마을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검불을 긁어모아 썰매에 싣고 갔다. 만천동에 집들이 늘어나면서 비구니들만 거주하는 암자인 ‘관음사’가 세워졌는데, 일설에는 이곳에서 맛좋은 샘물이 솟아난다고 하여 만천동(萬泉洞)이라 불리웠다고도 한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1966년 영랑동 전경. 좌측의 큰 건물이 속초도립병원. 1994년 1월 17자 설악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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