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속초로 귀향한 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30대 청년은 50대 중년이 되었고 타지에서 살아온 날들보다 고향에서 살아온 날들이 훨씬 많아졌다. 귀향에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불가피하게 떠밀리다시피 내려온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었으나 어쩌다 보니 귀향을 하게 된 것이고 또 어쩌다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다.
살아가다보면 어쩌다 이뤄지는 일들이 많다. 심지어 어느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우린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이 성숙해지는 것만큼 정신까지 따라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라서, 기대역할에 걸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미숙하고 불편한 상태로 말 그대로 ‘어쩌다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한 상황들 때문에 자중자애의 시간들이 길어지고 있다. 작년부터 여유가 생긴 시간들을 활용하고자 사무실 옆 조그만 텃밭에 이런 저런 식물들을 심고 가꾸게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농사를 짓기 위한 농기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게 되고 작물들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옛날말로는 ‘역마살’, 좀 더 유식한 체 하며 말하면 ‘호모 노마드’, 즉 유목형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조그만 밭농사를 지으며 생각되는 건 내 스스로가 정주형 인간의 모습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들이다. 아주 작은 씨앗, 그 속에 그런 미래가 담겨있을지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작은 씨앗들이 훌륭한 미래를 펼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 되었다. 가장 큰 감동은 무엇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작은 씨앗들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적당한 날 적당한 때에 정말 “뾱~!!”하고 작고 연하고 푸른 새싹을 세상에 선보일 때이다.
‘어쩌다’와 비슷한 맥락으로 ‘그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냥’은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없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누군가가 ‘왜?’하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대답할 때가 종종 있다. 누구나 보고 싶어서 그리워서 혹은 외롭거나 지쳐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연락할 때가 있다. 돈을 빌려달라든가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하는 연락이 아니라면 “왜 전화했어?”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냥 생각이 났고 그냥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 그리움과 연민과 공감을 원하는 마음들이 “그냥”이라는 말에 다 함축되어 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어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던 입사동기들, 선후배들, 심지어 직장상사였던 분들의 전화를 종종 받게 된다. 대학을 갓 졸업했던 젊었던 입사동기들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제 그 직장에서 부장이나 이사의 명함을 지니고 있거나 필자처럼 퇴사 후 자신의 사업을 펼치고 있고, 직장상사였던 분들은 퇴직 후 인생 이모작을 일구고 있다.
지난주에는 우연하게도 서울에서 부산에서 대전에서 고향 친구들을 비롯한 지난 내 젊은 시간들을 함께 했던 이들의 전화를 빈번하게 받게 되었다. 문득 생각이 났을 것이다. ‘문득’은 그리움과 연민과 공감을 원하는 마음들이 아주 적당한 날, 적당한 때라는 말일 것이다.
서로 한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필자의 전화를 받게 된다면 이렇게 받아들이시면 된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그를 향한 내 마음속에 심어둔 작은 그리움과 연민과 공감의 씨앗이 적당한 날 적당한 때에 문득 싹이 돋아 전화한 것일 거라고…. 그리고 “왜 전화했어?”라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항상 “그냥”일 거라고….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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