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사겸사 속초여중 관현악부 방문했는데…
여러 가지 악재들을 겪으면서도 관악부는 조금씩 자리가 잡혀갔다. 그래서 속초고 관악부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법도 찾게 되었다. 그때 문득, 1971년 18회 박태이 선배가 악장으로 있던 시절에 참가했던 합주경연대회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 대회에 대한 정보와 독주 부문 참가곡 추천도 받기 위해 트럼본 파트 박진호 후배와 함께 속초여중 이재균 음악 선생님을 찾아갔다. 당시는 속초여중 관현악부가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속초여중 음악 선생님은, 관악부 관련 일이라면 속초중을 찾아가지 왜 속초여중을 찾아왔냐고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드렸다.
“속초중은 관악단이라서 연주곡들이 행진곡 위주입니다. 그래서 대회 참가곡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초여중은 무대 연주회용 곡 위주의 관현악단이니 대회 추천곡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악기로 참가할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트럼본 독주 부문으로 참가할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다. 속초중 관악부 트럼본 파트에서 3년 동안 활동했던 박진호 후배 정도면 충분히 실력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음악 선생님이 중학생까지만 참가대상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너무 아쉽고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속초여중 음악 선생님께서 이런 제안을 하셨다.
“너희들이 우리 속초여중 대회 참가 예정자들과 함께 연습도 하면서 부족한 거 있으면 가르쳐주기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그래서 필자와 박진호 후배는 주말마다 속초여중 음악실을 방문했다. 하지만 우리는 행진곡에는 익숙했지만 무대 연주용 곡은 좀 생소했다. 그래서 속초여중 관현악부 여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속초여중 관현악부가 무척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속초여중 관현악부는 전담 음악 선생님도 계셨고, 각 파트마다 음악 코치들도 있었다. 그 코치들은 음악 전공생들이었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음악 재능 기부자들이었다. 거기에 비해, 우리 속초고 관악부는 음악 환경이 정말 나쁘다는 것을 또다시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악부 전담 음악 선생님? 파트별 음악 코치? 당시 속초고 관악부에서는 꿈같은 얘기였다.
악기들이라도 좀 쓸만 했으면 했다. 당시 필자가 불었던 클라리넷만 해도 나무 재질이 아닌, 금속 재질이었다. 클라리넷은 목관 악기로 원래는 ‘흑단’이라는 까만색의 나무 재질로 제작된다. 그런데 당시 속초고 관악부에서 사용했던 클라리넷은 ‘황동’ 재질에 은색(銀色) 도금이 된, 은관(銀管) 클라리넷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악기이다. 그런 데다가 악기가 워낙 오래되다 보니 은색 도금마저 여기저기 벗겨져서 악기의 색깔이 칙칙하고 누리끼리했다. 그런 음악 환경에서도 속초고 관악부의 전성기를 이끈 선배 형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다시 한번 또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환경을 탓하지 말고 더욱더 연습에 매진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인기 대중가요도 연습을
매일 교과서인 곡들만 연습하고 연주하니 뭔가 좀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래서 대중가요곡을 몇 곡 골라봤다. 하지만 당시는 관악 합주를 위해 편곡된 가요곡이 아주 드물었다. 자체적인 편곡이 필요했다. 그래서 19회 악장 출신 허승훈 선배에게 편곡을 부탁했다. 역시 허승훈 선배였다. 필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편곡을 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편곡된 곡이 인기 팝송 ‘뷰티풀 선데이’와 ‘토요일 밤에’ 두 곡이었다. 승훈이 형은 전문가에게 편곡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편곡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인기 있는 대중가요곡이다 보니 관악부원들이 다들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Y선생님같이 아주 고지식한 선생님은 “밴드부, 대중가요 연주하면 절대 안 돼요!”하고 단호하게 주의를 주셨다.
아무튼 그 두 곡으로 인해 관악부의 분위기도 좀 밝고 발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대입 예비고사일과 졸업식일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예비고사는 요즘 수능시험처럼 11월 중순 무렵에 치러졌는데, 수험생은 그 시험에 합격을 해야 본고사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예비고사는 대학 본고사 응시 자격시험이었다. 따라서 그 시절에 그 예비고사는 정말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 시험에 낙방을 하면 희망 대학 원서조차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속초가 아닌 강릉에서 치렀다.(영서 지역에서는 춘천) 그래서 시험 전날 1박 2일 코스로 강릉으로 갔는데, 그렇게 강릉으로 떠나는 날이면 전교생은 물론 관악부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환송식을 하곤 했다.
하마터면 염라대왕님 앞에
그런데 하필이면, 필자는 예비고사 치르기 4일 전에 연탄가스 중독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하여 이틀 만에 겨우 깨어났다. 그래서 그 환송식 행사는 악장도 없이 치렀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들께서 “염라대왕을 봤냐?”면서 농담을 하셨다. 그러면서 ‘회복이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하셨다.
환송식 관악부 행사는 그렇게 끝이 났고 졸업식 행사가 남아있었다. 그게 필자로서는 마지막 행사였다. 그래서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을 써서 행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평소에도 관악부에 대해 무척 부정적이었던 그 K선생님이 관악부 없이 졸업식 행사를 치르겠다고 하셨다. 졸업식 행사는 필자에게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행사일 뿐만 아니라, 학부모님과 내빈들에게 속초고 관악부 부활을 아주 자연스럽게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K선생님은 관악부 동원은 안 되고 관악부 연주를 녹음해서 그것으로 행사를 치르자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관악부 악장으로서 그 제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그러다 어느 선생님 한 분이 필자를 불러 조용히 위로하시며 마음을 진정시켜 주셨다.
관악부도, 후배들도 없이 치러진 졸업식이었지만…
결국, 그 졸업식은 K선생님 뜻대로 관악부 없이 녹음된 음악으로 치러졌다. 그런데 더욱 아쉬웠던 것은, 1975년 1월에 치러졌던 그 졸업식에 관악부 동원이 불발된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관악부 후배들이 단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졸업식에는 재학생 후배들 모두가 참석한 게 아니라, 학교 방침에 의하여 1학년의 경우는 한 개 반만 참석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반에는 관악부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졸업식에서 필자는 관악부 악장으로서 헌신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공로상’을 수상했다. 예전에 관악부 악장은 19회 허승훈 선배의 경우처럼 ‘특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관례를 깨고 필자는 특기상보다는 품격이 좀 더 높은 공로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런 큰 상을 수상한 데는 이우성 담임 선생님(영어)의 역할이 무척 컸다.(심사과정에서 곡절이 좀 있긴 했지만)
그렇게 받은 상이라서 지금도 필자의 앨범속에 상장이 아주 잘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졸업식 날 또 한 가지 감사한 일이 있었다. 관악부도 없이 치르는 졸업식이라 악장으로서 정말 섭섭하고 아쉽기 짝이 없었는데, 김택인 선생님(국어)께서 악장으로서 마지막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그동안 음악 선생님도 안 계신 어려운 관악부를 보살피고 이끄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 졸업식에서 마지막으로 음악 지휘는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시면서 선생님께서 필자에게 지휘봉을 손에 건네주셨다. 순간, 눈물이 핑돌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날 필자는 악장으로서 그렇게 김택인 선생님께 건네받은 지휘봉으로 마지막 지휘를 했다. 비록 관악부의 현장 연주가 아닌 녹음 연주였지만.
관악부 시절을 되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일만큼이나 힘들고 괴로운 일도 많이 겪었던 것 같다. 하지만 50여 년의 긴 세월이 지난 지금은, 관악부 시절에 겪었던 힘들고 괴로운 일조차도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추억의 소중함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또한 관악부에서 겪었던 그 힘든 경험들이 필자를 단련시켜서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나가는 데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관악부 활동을 할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독자분들, 그리고 소중한 지면을 할애해 주신 설악신문사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
이순종
속초고 21회 관악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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