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뉴스홈 > 기획특집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납북귀환어부 진실규명 이야기<42> 승운호 귀환어부 김씨의 사연
반공법 위반사건 두 차례 재심 무죄선고…억울한 누명 모두 벗어
등록날짜 [ 2024년06월10일 14시58분 ]


김씨는 지난 2021년 6월 25일 속초시근로자복지회관에서 열린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인권유린·간첩조작사건 토론회”에 참석해서 처음으로 간첩으로 내몰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나이 스물도 안 되어 두 번씩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면, 낙인 찍힌 이 땅에서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수십 년 동안 깊은 한을 품고 살아온 납북귀환어부가 최근 두 차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완전히 누명을 벗었다. 
두 차례 재심 무죄선고의 주인공은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김○대(69세)씨이다. 김씨는 지난해 5월 12일 춘천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다른 승운호 선원들과 함께 1972년 납북귀환사건 반공법 위반 처벌사건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올해 5월 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1975년 반공법 고무찬양죄 위반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로써 김씨가 자신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내몰렸다고 토로한 지 3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완전히 벗었다. 
김씨는 지난 2021년 6월 25일 속초시근로자복지회관에서 열린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인권유린·간첩조작사건 토론회”에 참석해서 처음으로 간첩으로 내몰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김씨의 발언 내용은 2021년 7월 5일자 <설악신문> 기사에 ‘고성군 아야진 김모씨’의 발언으로 실렸다. 그러나 이후 김씨가 명예회복에 적극 나서는 데 다시 6개월 이상의 기간이 걸렸다. 김씨는 트라우마가 워낙 심해서 피해사실을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이 쏟아져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결국 6개월이 지나 김씨는 두 건의 반공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신청도 하고, 변호사를 통해 재심도 신청했다. 
 
16세 어린 나이에 오징어잡이 나가 납북
김○대씨는 1971년 8월 4일 16세 어린 나이에 고성 아야진항 소속 승운호를 타고 오징어잡이에 나가 납북되어 북에서 13개월 동안 억류되었다가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귀환했다. 귀환 후 김씨는 속초시청에 불법 감금되어 시청 앞 여인숙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받았으며, 반공법 수산업법 등 위반으로 구속되어 3개월 이상 옥살이를 하다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지 2년 후인 1974년 김씨는 속초항 유성호를 타고 서해로 조기잡이를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인천 부평경찰서로 연행되어 반공법 고무찬양죄로 징역 단기 1년 6개월, 장기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74년 체포될 때 김씨는 19세였다. 
김씨는 1974년 사법경찰관들에게 강제연행되어 4일간 영장 없이 불법구금되어 조사를 받은 사실이 확인되어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졌다. 김씨는 당시 “북에 가보니 과수원에 사과가 억세게 많았다”, “탁아소에 가보니 애들이 부모도 없이 잘 자라고 있더라”, “농장시설이 잘 되어 있더라” 등의 말로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이에 대해 49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재판부는 “불법 구금 기간 중에 작성된 진술서와 경찰 피의자 신문조서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의자가 일상적인 대화 과정에서 자랑삼아 일회적으로 발언한 것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피상적, 주관적인 개인적 감정과 소회를 담은 것에 불과하다”며, “발언 내용도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2022년 1월 필자는 김○대씨로부터 두 번의 억울한 반공법 위반 처벌과 살아온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다. 다음은 김○씨가 직접 밝힌 피해 내용이다.

 

나는 1971년 만 16세의 나이에 오징어잡이를 나갔다가 납북되었다. 동광중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먹고 살기 위해 배를 탔는데, 고성 아야진항 소속 승운호에 친구들과 함께 승선했다. 승운호는 3박4일의 일정으로 울릉도 동북쪽 대화퇴어장에 가서 오징어 조업을 마치고 아침에 귀항길에 올랐다. 일반선원인 나는 선실에서 자다가 총소리에 잠이 깼다. 그때가 정오쯤 되었다. 일어나 보니 북한 경비정이 우리배 양 옆에 배를 붙여놓고는 북한 사람들이 우리배로 건너와 공포탄을 쐈다. 그들은 우리 더러 모두 배 앞 갑판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배를 끌고 북으로 견인해 갔다. 1971년 8월 2일 납북되어 1년 이상 북에 억류되었다가 1972년 9월 7일 다른 납북 어선들과 함께 속초항으로 귀환했다.  
속초항에 들어와서는 바로 속초시청 3층 강당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한 명씩 시청 앞 여인숙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나는 5~6회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으며 구타는 말할 것도 없고, 물고문도 받았다. 여인숙 방에 나를 눕혀놓고 얼굴을 다 가리게 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전자로 수건 위에 물을 부었다. 물을 몇 번 부으면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가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숨이 막혀 컥컥대다가 기절했다. 그러면 다시 사람을 깨우고 또 고문을 진행했다. 북에서 무슨 지령을 받았느냐고 추궁했다. 지령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면 계속 추궁했다. 조사를 받을 때마다 물고문을 당했다. 차라리 맞는 게 낫지 물고문은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다. 
2주 정도 속초시청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고성경찰서로 끌려갔다. 며칠 있다가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되어 속초검찰청에 가서도 조사를 받았다. 재판에 회부되어 1심 재판에서 수산업법과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나서 풀려났다. 집에 돌아와서는 1주일에 한 번씩 고성경찰서를 찾아가 신고를 해야 했다. 어디 다른 지역으로 갈 때도 신고를 해야 했고, 돌아와서는 다시 신고를 해야 했다. 경찰서 형사들 말고도 보안대에서도 나를 감시했다. 고성경찰서 형사들은 다 아는 얼굴인데,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동네에 와서는 나에 대해 물으며 뒷조사를 했다. 보안대 사람들로 추정된다.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지 1년 후 나는 속초항 소속 유성호를 타고 서해 조기잡이를 하러 인천 연안부두로 갔다가 간첩으로 내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그때 나이가 19살이었다. 유성호는 누나와 매형이 선주였다. 조기잡이를 가서 그물을 당겨 놓고는 선실에 가서 잠을 잤다. 선실에서 같은 배 선원인 인천 사람이 “성대가 북에 끌려갔다 왔다는데, 그 이야기 좀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북에 끌려갔다 온 이야기, 북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해줬다. 그 선원은 나한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전했는데, 그 사람이 인천 부평경찰서에 나를 간첩으로 신고했던 것이다. 
1973년 11월초 조기잡이를 마치고 속초로 귀항했다. 나는 고성 아야진 집이 멀어서 누나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은 배에서 잤다. 하루는 아침에 임검소 순경이랑 사복입은 3명의 경찰이 배로 찾아왔다. 검은 찦차였다. 나를 차에 태우더니 인천 부평경찰서로 끌고 갔다. 
부평경찰서에서 14일간 밤낮으로 조사를 받았다. 인천 부평동 대공분실이었다. 경찰관들은 내가 북에서 지령을 받고 남파된 것이 아니냐며 추궁했다. 누굴 만나기로 했느냐, 어떤 지령을 받았느냐. 좁은 조사실에서 의자에 나를 앉혀 놓고는 형사들이 교대로 24시간 계속 조사했다. 나를 붙들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 잠이 들면 때려서 잠을 깨웠다. 내가 잠에 취해서 횡설수설 누굴 만나기로 했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는 고성 아야진 집에 형사들이 찾아와 집을 샅샅이 뒤졌다. 몇 차례 아야진집을 찾아와 뒤졌지만, 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를 간첩으로 몰고 가다가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검찰은 고무찬양죄를 적용해 나를 기소했다. 
1심 인천지방법원에서 단기 1년 6개월, 장기 2년을 선고받았으며, 항소해서 서울법원에서 단기 1년, 장기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처음에는 인천 학익동교도소(소년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형이 확정된 후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후 출소하였다. 당시 나는 미성년자라서 단기 장기형을 함께 선고받았다. 보통 단기형을 살면 출소를 하는데, 사상범이라고 해서 장기형 기간인 1년 6개월을 다 채우고 출소해야만 했다. 사상범은 다른 사람들과 격리해 독방에 수감시켜 출소할 때까지도 독방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상 전향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1971년 북에 끌려가서 탈출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납북귀환 이후 속초에서 재판을 받을 때, 승운호 선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판사가 선장한테 북에서 내려오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선장이 “우리 선원 중 막내가 북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북에서 탈출하려 했던 일을 법정에서 말했다.
우리 납북어부들이 북에 끌려가 석암휴양소에 머물렀을 때였다. 한겨울 눈이 많이 내렸을 때 나는 무작정 남으로 내려가겠다고 혼자 휴양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산을 넘어서 가슴까지 들이찬 눈을 헤치고 이틀을 걸어서 무작정 남쪽으로 걸어 나왔다. 결국 기차역까지 갔는데 역원한테 붙잡히고 말았다. 이 일로 북에서 이틀 동안 감금당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판사는 다른 선원들은 저 어린애처럼 못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에 납치되어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다시 남으로 귀환해서도 간첩으로 내몰린 게 너무 억울하다. 아직도 그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다.

 

김씨는 두 번의 재심 무죄로 이제서야 명예가 회복되었다. 10대 소년에게 씌워진 주홍글씨 낙인이 일흔 나이를 앞둔 지금에서야 지워졌다. 수십 년 간 용공분자로 낙인이 찍혀 살아온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김씨는 그동안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보다는 가족들에게 갈 피해가 더 걱정스러웠다. 김씨는 “나는 나이가 먹어 괜찮지만, 나로 인해 어린 내 손자까지 또 무슨 피해를 입을 지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설악신문(www.sorak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설악신문 (soraknews@soraknews.co.kr) 기자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좋아요 0 싫어요 0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속초항, 환동해 글로벌 거점항 도약한다<2> 글로벌 허브 도시 신성장 이끄는 부산항 (2024-06-10 15:02:21)
역대 최대 규모의 스마트 모범 대회 치러내 (2024-06-10 14:52:22)
플라이강원 다시 난다…가전제품...
양양서 첫 개최 제59회 강원특별...
“상도문 돌담마을 숲길공원서 ...
해수욕장 개장 앞두고 상어방지 ...
고성군 노후 경유차 조기 폐차 3...
“경동대 부지, 개발행위허가 제...
1
불편함 감수하면서도 ‘교복 착용 지지(57.7%)’
1968년, 문교부가‘ 학생의 학생 다움’을 강조하며...
2
가림막에 막힌 속초 백년가게 ‘냉면집’
3
플라이강원 다시 난다…가전제품 중견기업 ...
4
“경동대 부지, 개발행위허가 제한지역 지...
5
제46회 양양문화제 20일 남대천서 ‘팡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