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바람이 세찬 속초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고소한 빵 냄새가 따라온다. 속초는 여행자에게 스쳐 가는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다. 여행지마다 줄을 서야 살 수 있는 대형 베이커리, 전국에서 몰려오는 유명 브랜드 빵집이 넘쳐나는 요즘, 건강한 빵을 만들며 자신의 꿈을 빚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첨가물을 줄이고, 제철 재료를 고집하며, 정성껏 반죽하는 손길이 특별한 빵을 만든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속초에 정착해 작은 빵집을 열고, 빵을 통해 삶을 다시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온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사잇’ 매장의 빵 진열대. 제철 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천연발효 빵들이 손님을 맞는다.
계절 담은 천연발효 빵이 자라는 곳
속초시 교동, 작은 언덕길을 올라가면 햇살 드는 마당을 품은 빵집 ‘사잇(SAIT)’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 연 지 두 달이 채 안 된 작은 가게이지만, 골목 특유의 정취와 정성 가득한 빵으로 천천히 입소문을 타고 있다. 매일 오븐에서 △플레인 메밀 치아바타 △감자 체다 치아바타 △콘 치아바타 △계절 한정 꿀고구마 치아바타가 구워진다. 이곳 빵은 제철 재료를 고집하는 것은 물론, 모든 빵을 천연발효종으로 발효시킨다. 천연발효종은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 동안 매일 세심하게 반죽을 돌보며 키워야 한다. 그렇게 긴 시간 정성을 들여야 빵 고유의 깊은 향과 맛이 살아나 특별해지지만, 그만큼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 작업이다.
인생도 공백에서 발효가 시작된다
어릴 적 빵을 좋아했던 김도연(26) 사잇 대표는 초등학교 장래희망 난에 ‘빵 만드는 사람’이라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고향 경북 상주를 떠나 서울로, 다시 호주로, 대전으로 이어진 이주 생활. 스물셋 어린 나이에 400만원을 들고 떠난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처음 접한 주방 일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일을 마치고 돌아와 방 안에서 울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너무 서툴고, 빨리 배우고 싶은 마음만 컸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런 시간도 결국 저를 깊게 발효시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잇’이라는 가게 이름은 김 대표가 속초문화관광재단 로컬 비즈니스 스쿨 ‘동(東)그라미’ 과정을 수료하면서 구체화 됐다. 도전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인생의 공백과 멈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게 이름은 사이시옷, 사잇소리에서 따왔어요. 빵에 송송 뚫린 기공처럼, 인생에서도 멈추거나 구멍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 시간들이 발효처럼 결국 제 안에서 더 깊은 맛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속초에서 장래희망의 꿈이 피어나다
속초는 김 대표에게 처음으로 ‘정착’을 꿈꾸게 만든 곳이다. 서울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혼자 찾은 정암해변에서, 그는 바다와 바람을 곁에 둔 일상을 상상하게 됐다. 대전에서 일할 당시 만난 연인 박광석(28) 씨는 김 대표의 결정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연고도 없고 기반도 없는 속초에서의 창업은 무모한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정말 걱정이 많았어요. 주변에서 준비가 덜 된 것 아니냐고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아니면 영영 못 할 것 같았어요. 무조건 해보자,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컸죠.”
그렇게 속초에 둥지를 튼 김 대표는 작은 가게 ‘사잇’을 열었다. 김 대표가 반죽과 굽는 일을 맡고, 든든한 동반자 박 씨는 손님 응대와 매장 운영을 도우며 둘만의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게를 열기까지의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김 대표는 ‘동그라미’ 창업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속초시의 ‘생애 첫 창업지원금’ 사업에 선정되어 초기 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청년 창업가 간담회에 초청돼서 창업자들이 마주한 현실에 대해 이병선 속초시장과 대화도 나눴다. 창업 여정은 단순히 그의 열정만으로 이뤄진 건 아니었다. 지역의 지원이 함께였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속초시 교동 골목에 자리 잡은 빵집 ‘사잇’을 운영하는 김도연 대표와 박광석 씨.
손님 공유하는 따뜻한 골목 문화
가게 문을 연 뒤에도 대대적인 홍보는 없었다. SNS와 중고거래 플랫폼을 통해 조심스레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주말이면 오후 1시 전에 빵이 모두 팔려버리는 일이 흔하다.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사잇’이 자리를 잡아가는 데에는 골목 상권과의 공생이 큰 힘이 됐다.
김 대표는 커피를 직접 판매하기보다 손님들에게 인근의 좋은 카페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주변 카페들 역시 사잇의 빵을 가져다 팔거나 찾아온 손님들에게 소개해준다. 서로의 손님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골목 상권의 따뜻한 풍경이, 사잇이 천천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속초라는 도시에 대한 김 대표의 애정은 지역 골목을 중심으로 더 많은 이들이 속초를 ‘천천히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속초에는 정말 좋은 카페가 많아요. 제가 잘하는 건 빵이고, 커피는 그 카페들이 빛나야죠. 같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가게들이 골목마다 숨어 있어요. 속초를 찾는 분들이 대부분 바다만 보고 카페를 찾는데, 지역 로컬가게들을 소개하는 지도 같은 게 생기면 좋겠어요. 다들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속초를 더 느꼈으면 해요.”
버리지 않고 나누며 키우는 가치
김 대표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마주한 골목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커피를 사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꽃도 갖다주고, 바질을 키우던 분이 잘 자란다고 나눠준 적도 있어요. 귤이나 과일을 슬쩍 놓고 가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 순간들이 제일 감동이에요. 제가 손님으로 가서 가게 사장님께 뭔가를 드린 적은 별로 없거든요.”
받기만 한 마음에, 그는 작게나마 되돌려주는 방법을 고민했다. 빵이 남는 날이면 지역아동센터를 직접 찾아가 전달한다. 아직 체계적인 푸드뱅크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속초에서 꾸준히 나눔을 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하루종일 정성껏 만든 빵을 그냥 버리는 건 정말 마음 아픈 일이에요. 손으로 키운 아이를 버리는 기분이거든요. 필요한 분들께 드릴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사잇’ 내부 모습. 작은 공간이지만 자연광이 가득 들어오는 주방과 마당이 인상적이다.
좋아하는 속도로 익어가는 가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김 대표는 서두르지 않고, 빵처럼 천천히 가게를 키워가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작은 규모로 운영하고 있지만, 언젠가 샌드위치를 비롯해 메뉴를 다양하게 확장해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다만 욕심내기보다 제 속도로 단단히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빵도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천천히 발효될수록 특유의 향과 맛이 살아나요. 급하게 부풀린 빵과는 깊이가 다르죠. 그런 과정을 매일 겪다 보니, 사람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삶의 공백 같던 순간들이 결국은 제 안에 뭔가를 채워주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빵이 발효되듯 제가 좋아하는 속도로 풍미 있게 익어가는 가게를 만들고 싶습니다.”
사잇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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