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커퍼 박물관 내부 전경. 다양한 커피 추출기기와 세계 커피문화를 소개하는 전시가 마련돼 있다.
“강릉 사람들은 개두릅이 나는 철이 되면 삶아 냉동 보관하고 지인에게 선물도 합니다. 개두릅은 잎과 줄기가 연해 상온에서 조금만 지나도 잎이 녹아요. 연할 때 쌈도 싸 먹고 약간의 소금을 묻혀 들기름 넣고 무쳐 먹어도 좋아요. 개두릅나물밥, 개두릅김밥, 개두릅장아찌로 먹어도 맛있죠.”
강릉 사람들이 평생 밥상 위에 올려온 제철 식재료와 음식 이야기를 계절별로 정리한 <그리움이 고이는 강릉음식>은 2021년 강릉문화재단이 운영한 시민참여형 문화도시 조성사업 ‘작당모의’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됐다. 손 글씨로 쓴 조리법과 색연필로 그린 음식 그림에는 음식이 곧 기억이고 공동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세계 미식 도시들과 네트워크 확대
강릉은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되며 ‘시나미 강릉’을 도시 비전으로 내세웠다. ‘시나미’는 강릉 사투리로 ‘천천히, 여유 있게’라는 뜻이다. 이 말처럼 강릉은 조급하지 않되, 멈추지 않고 시민과 함께 지역 문화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문화도시 조성사업은 문화예술, 생활문화, 공동체 활동, 지역 자산 발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민 주도의 자율성과 참여 기반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음식문화 역시 그 핵심 축 가운데 하나다.
2023년 10월, 강릉은 ‘유엔 세계 도시의 날’을 맞아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UCCN) 미식 분야 신규 도시로 지정됐다. 초당두부, 옹심이, 감자전, 막장 등 강릉의 전통 음식은 물론, 최근 유명해진 커피와 빵, 짬뽕 등 현대적 미식 콘텐츠가 문화와 일상에서 소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강릉은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관광도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교통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며 서울에서 당일 여행이 가능한 도시로 부상했다. 그러나 자연자원 중심의 관광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렵다는 인식 아래, 한옥, 음식, 서핑 등 ‘경험형 도시 콘텐츠’로 방향을 전환해 왔다. 음식문화는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다.
강릉시 관계자는 “창의도시 가입은 세계 미식 도시들과 교류하는 네트워크이자, 행정이 직접 끌고 가기보다 민간과 다양한 주체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플랫폼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강릉은 김해시와 공예·음식 분야에서 지속적인 문화도시 교류를 이어가고 있으며, 포럼·워크숍 등을 통해 국제 미식도시 간 네트워크 확대를 꾀하고 있다.
강릉문화재단의 시민참여형 음식기록 프로젝트 <그 리움이 고이는 강릉음식>. 강릉 사람들의 사계절 밥 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출처:강릉문화재단 홈페이지 PDF 최종합본)
‘음식문화연구회’, 강릉 음식문화 기록
음식문화 기반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2009년부터 강릉시는 초당두부마을, 병산 감자옹심이마을, 사천 모래마을, 해산물 주문진, 소금강 산채마을 등을 음식문화특구로 지정하고, 식재료 기반의 도시 콘텐츠를 구축해왔다. 특히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입식 전환, 화장실 개선, 장애인 접근성 강화 등 인프라 정비와 음식문화 개선이 동시에 이뤄졌다.
이러한 흐름의 한 축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민간 조직의 꾸준한 실천이 있다. 2023년 정식 발족한 ‘음식문화연구회’는 현재 30여명의 회원이 정기적으로 모여 제철 식재료를 중심으로 사라진 음식을 복원하고, 지역 노포를 조사하며 조리법과 식문화 구술을 기록하고 있다. 강릉로컬푸드연구소 ‘연미소’ 대표인 김세경 회장은 “음식은 전통도 창의도 결국 사람이 남기고 연결하는 것”이라며, “기록이 없으면 그 지역 음식문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강릉은 비교적 일찍 음식 아카이빙을 시작했기에 창의도시를 준비할 수 있었고, 이것이 강릉의 미래 경쟁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음식문화는 단지 옛 음식을 보존하는 작업이 아니라, “지역 식재료와 조리방식을 오늘날의 생활문화와 연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강릉 음식문화특구 중 하나인 병산 감자옹심이마을 입구. 지역 고유의 식재료와 음식이 마을 단위로 브랜드 화되고 있다.
민간 주도로 ‘커피도시 강릉’ 브랜드화
커피문화 역시 대표적인 민간 주도 사례로 꼽힌다. 2001년 바리스타 1세대인 최금정 커피커퍼 대표가 안목해변에 카페를 처음 열었고, 이후 이 일대는 전국 최초의 커피거리로 발전했다. 당시 횟집만 즐비했던 해변에 카페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3년 만에 거리 전체가 커피 전문점으로 채워졌고, 안목 카페거리는 전국 커피거리의 원형이 됐다.
최 대표는 이후 커피농장, 박물관, 커피축제를 기획하며 ‘커피도시 강릉’의 브랜드화에 기여했다. 최근에는 순수 민간 자본으로 세계커피축제를 개최하며 도시문화와 커피산업의 연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최금정 대표는 “커피는 단순한 음료로서가 아니라, 문화적 해석과 이야기가 덧입혀질 때 비로소 도시의 정체성을 담는 콘텐츠가 된다”며, “축제 또한 하루 소비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도시 기억을 형성하는 문화적 장치로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릉은 전통 음식과 현대 미식 콘텐츠, 그리고 시민의 참여와 민간의 축적이 결합해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해나가고 있다. 유네스코 창의도시 지정은 그 결과일 뿐,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도시가 스스로의 고유한 문화를 발굴 및 체계화하고 연결했다는 점이다.
속초 역시 실향민 음식과 해산물 가공기술 등 지역 고유의 자산을 지닌 도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자산을 어떻게 정의하고 기록하며, 누구와 함께 도시의 이야기로 엮어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상상력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