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필자가 중학생 시절의 이야기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기 전이어서 검은색 교모에 검은색 교복, 검은색 운동화를 착용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색깔만 국방색으로 바꾸면 영락없는 군인의 복장이었다. 게다가 머리도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고 다녔으니 말이다. 또 그 때 당시에는, 교복 왼쪽 가슴에 패찰을 달고 다니는 일이 자주 있었다. 리본모양으로 달고 다녀야 했던 그 패찰에는 시기에 따라, ‘불조심’, 또는 ‘반공 방첩’ 등등의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던 문구 중 하나는 ‘고향심기 운동’이었다. 무슨 식목일에 심는 나무도 아니고 고향을 심다니….
이제야 생각해 보게 되는 거지만, 당시 속초는 시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고성군의 일부와 양양군의 일부를 뚝 떼어 시의 행정구역으로 설정해 놓은 곳이었다. ‘오징어 파시’가 형성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설악산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인구가 늘고 있었던 때였다. 당연히 속초에는 토박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었고, 타지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속초는 잠시 머무는 타향일 뿐이었다. 그래서 속초시는 아마도 속초가 고향이라는 개념을 시민들에게 갖게 하기 위해 ‘고향심기 운동’이라는 슬로건을 펼쳤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속초는 동서고속철도의 건설이 확정되고,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도시 전체가 건설 붐으로 어지러울 정도이다. 저런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장소까지 곳곳이 파헤쳐지고 이미 완공을 앞둔 고층 아파트들과 진행 중인 건설현장에 높이 솟은 타워 크레인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장악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가는 속초의 모습을 보면서,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 중 하나인 젠트리피게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미 서울의 홍대입구 지역이나 제주지역 등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말이다. 토박이의 개념이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채, 제대로 된 인구의 유입도 없이 외부 자본에 의한 무분별한 건설로 개발이 계속된다면 향후 속초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될까?
수년전 지인의 안내로 경남 통영시에 관광을 다녀온 적이 있다. 속초에 버금갈 정도로 남해안 일대에서는 매우 훌륭한 관광자원을 보유한 곳이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충렬사를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동피랑 벽화 마을과 요트 클러스터,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치는 재래시장도 볼거리였고, 곳곳에 문화유적과 자연환경, 해저터널을 비롯한 근대 유산 등이 적절히 섞여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근 거제도를 중심으로 조선 산업이 활성화되던 때여서인지 도시 전체에 활력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내가 가장 감명 받았던 부분은 다른 어떤 관광자원도 아닌 그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등의 문인들과 화가 이중섭, 음악가 윤이상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긍지는 놀라웠을 뿐만 아니라 부럽기까지 했다. 유치환 문학관이나 윤이상 기념 음악관을 둘러보면서 통영시에서 그 곳 출신 예술가들을 예우하는 방식에 감탄했고, 그들의 정신세계가 면면히 통영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속초는 처음 시가 형성되었을 때처럼 다시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외형적인 발전에만 포커스가 맞춰지게 된다면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아 아무 느낌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도시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제라도 문화적 소양이 넘쳐나는 정말 살만한 도시로 만드는 지역문화 개발계획이 오히려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타지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 함께 만든 속초라는 뿌리는 배타적이지 않으면서도 정서적으로 향기가 가득한 풍토에서 자라야 한다. 우리 지역 출신 예술가들에 대한 예우를 높이고 이제라도 그들이 편히 활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속초가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에 테마를 입히고 속초만이 가질 수 있는 유니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 것은 잎과 줄기와 꽃으로 확인할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그것들이 만개하기 위한 선행조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의 튼실한 성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뿌리에 양분을 주고 잘 키워나가는 일이 지금 여기 속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무일 것이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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