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앉아 있던 자리/누워 있던 자리/모두가 비었어요//당신과 내가 손잡고 놀이터를 걷다가/잠시 앉았던 그 벤치/모두가 그대로예요//그런데 당신만 없어요.(빈자리, 이옥임)
현관에 들어서자 왼편 벽에, 해탈한 보살 같은 인물사진이 걸려 있다. 반가운 손님이라도 마중 나온 듯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다. 이옥임(73, 조양동, 사진) 씨는 들고 나며 이 사진에 인사를 한다. 여보, 갔다 올게요. 여보, 다녀왔어요. 18년간이나 병든 몸으로 그녀의 옆을 지키다가 작년 7월 천사처럼 조용히 눈을 감은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이다. 살아생전 무척이나 다정했던 남편을 생각하며 이옥임 씨는 그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손편지도 쓴다. 잠들기 전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하듯 남편에게 일기 같은 편지를 쓴다.
‘설 쇠고 나서 아들들이 돌아간 후로는 보일러를 켜지 않았어요. 추우면 두터운 겉옷을 입고 생활하고 있지요.(2018. 2. 27)’, ‘외롭게 지내다가 얘들이 오면 사람 사는 집 같을 거예요. 삼겹살 수육에 토종닭 쪄놓고 기다렸지요. 오후 늦게 도착해서 저녁으로 먹었는데 맛있게 잘 먹더군요. 내일은 한우 불고기 해 먹이려고 재워놓았어요.(2017. 12. 22)’, ‘왜, 당신이 있을 때는 무엇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요즈음은 무기력해지고 하기가 싫어지는지 모르겠어요.(2017. 12. 17)’, ‘아직도 감귤이 비싸 한 번도 사다 먹지 못했어요. 당신이 있으면 즙이라도 짜서 당신 먹게 하려고 비싸도 샀었는데 이제는 그게 안 되네요.(2017. 11. 24)’, ‘한우 잡뼈도 삶기 시작했어요. 날씨가 추워져 국물 식히기가 좋아서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아이들이 오면 사골 라면이라고 맛있게 먹을 거니까요. 여보! 당신이 없어도 잘살고 있는 마누라 보면 대견하지요? 사랑해요.(2017. 11. 17)’
1999년 5월 11일. 잘못된 투자 때문에 동업자와 한참을 전화로 말다툼한 남편이 맥없이 쓰러진 날이다. 풍이었다. 그녀가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풍요로움이 한꺼번에 꺼진 날이기도 했다. 병원에 누운 남편 대신 그간의 사업을 정리하고 빚잔치를 위해 가산을 모두 팔고 보니 세 아들 학비며 장가보내기 버거운 액수가 수중에 남았다. 여든 넘은 시어머니가 보다 못해 평생 지니고 온 반지까지 내놓았다. 부유한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쉬운 줄 모르고 살아오던 이옥임 씨는 갑자기 닥친 이 불운으로 오랜 세월 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아파트 화단에 핀 새싹을 보았다. 긴 겨울 언 땅을 비집고 돋아난 여린 싹이었다. 그 순간 어떤 깨달음이 번쩍, 그녀의 뇌리를 번개처럼 치고 지나갔다.
‘눈 먹고/바람 마시며/용케도 살았구나!/오늘은 경칩 날/(중략)//우리 사람들은/조금만 힘들어도/주저앉아 일어설/힘을 잃지만/너희 가녀린 새싹들은/어쩜 그렇게도 힘이 쎄니?/나도 너희들을 본보기 삼아/힘을 내며 살란다(새싹들, 2013.3)
한달음에 써 내려간 그녀의 첫 시다. 물론 전문(全文)은 아니다. 이옥임 씨는 지금도 이 시를 보면 그 오묘한 순간의 깨달음에 감격을 느낀다고 한다. 그녀는 이 시를 쓰고 그간의 고통을 씻어내듯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 후 몇 년간 감정이 나는 대로 퇴고 한번 없이 줄줄 시를 써 내려갔다. 물론 시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 관련 평생교육강좌에도 발길을 준 적이 없다. 그냥 그런대로 자신을 이끄는 생각을 종이 위에 쏟아냈다.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감동을 준 순간을 기록한 이 시들을 가지고 얼마 전 <설악신문사>로 찾아왔다. 자신에게 생의 기쁨을 알려준 시를 신문에 실어서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내비쳤다. 70여 편의 편지와 80여 편의 시의 존재를 편집부에 알려왔는데 그중 스무 편 가량을 먼저 보게 되었다. 읽고 나서 그걸 내게 넘긴 편집장에게 나는 전화로 무척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이옥임 씨를 만나보고, 받아온 나머지 원고에서 이 구절을 읽다가 울컥 눈물을 쏟고는 편집장에게 화를 낸 나를 스스로 꾸짖었다.
‘당신을 보내며/이런 기도를 했어요/여보/우리 나중에 만나요/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좋은 곳에 갔을 거라구요//(중략)//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사랑한다구요/아주 많이많이요(기도, 2017. 7.17)
<설악신문>을 찾아온 이옥임 씨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낸다. 갓 핀 새싹 같은 그녀의 시에 화사한 꽃망울들 맺히고 터져, 99세에 ‘약해지지 마’를 쓴 시인 ‘시바타 도요’처럼 삶의 기쁨 몇 권쯤 속초에서 열매 맺기를 간절히 빈다. 이옥임 씨 앞날에 커다란 문운이 있기를.
위나정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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