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과 동해 절경을 간직한 양양은 조선시대 풍류의 고장이었다. 옛 선인들의 글에는 양양이 금강산 유람길에 들러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자주 나온다. 낙산사 바로 앞쪽에는 이화정(梨花亭)이 있었다. 이곳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 명소였다. 백호 윤휴(1617~1680)는 자신의 금강산 유산기 풍악록에서 이화정에서 술을 마시며 “삼천길 설악산에 뭉게뭉게 구름인데 /구만길 동해에선 둥그렇게 달이 솟네”라고 노래했다.
양양의 술은 일제강점기 잡지와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12월호 월간잡지 개벽에 실린 강원도 기행문 ‘영서8군과 영동4군’에서는 양양군을 대표하는 먹거리로 황어회와 연창 탁주를 소개했다.
양양명물 연창탁주와 황어회는 양양의 명물인데, 그 탁주와 황어회는 특히 가미(佳味)가 있어서 속담에 양양군수가 체임(遞任)될 때에는 그것이 아까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먹어보지는 못하였으나 말만 들어도 침이 슬슬.
탁주로 유명한 연창리. 조선시대 그곳에는 연창역이 있었다. 연창역은 양양읍에 인접한 역으로 역주변에는 민간인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주막이 들어섰을 것이다. 주막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술. 그래서 연창탁주가 유명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속초 최초 양조조합, 비선양조조합
1929년 당시 속초를 비롯한 양양군에는 자가용탁주 제조자가 1천7백95명, 판매용탁주 소량제조업자가 1백35명이었다. 숫자로만 봐도 양양에서는 적잖은 민가에서 술을 빚어 먹거나 제조해 판매했다. 그러나 이 많은 술 제조업소는 1929년 8월 양양군의 폐업조치로 사라졌다.
당시 양양군 재무과는 군내 소규모 주류제조업체를 모두 페업조치하고 대신 대량주류제조장 25개소를 설치해 주류제조를 집약시켰다. 그리고 민가의 밀주 제조를 근절하기 위해 강력하게 단속을 실시했다. 판매용 탁주 제조뿐만 아니라 집에서 담가 먹는 자가용 탁주도 일체 금지시켰다. 이때 지방색을 지닌 다양한 주류 제조의 맥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양양에서는 제조업자 20여명이 나서서 1929년 8월 15일자로 주식회사 양양국자(麴子)조합을 설립해 약주와 탁주, 국자(누룩)를 제조해 판매했다.
1932년 5월 영동6군연합회 주류품평회가 열렸다. 탁주와 약주, 소주, 국자(누룩) 4개 부문에서 출품 주류를 심사해 시상했다. 품평회에서 양양국자조합은 약주 부문 1등을 차지했으며, 탁주부문 수상자에 지금의 속초지역인 도천면의 유시영(柳時永)씨도 이름을 올렸다. 유시영씨는 1931년 당시 도천면협의원에 당선된 인물이다.
1932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는 비선양조조합이 속초항 수축 기부금으로 2백원을 냈다고 보도했다. 이 비선양조조합이 속초 최초의 양조조합으로 추정된다. 비선양조조합은 1935년 6월 14일자 <부산일보> 6면 양양군 소개 특집판에도 소개되었다. 양양군 제일의 양조조합인 속초의 비선양조조합은 1년 양조고 750석으로, 지역의 조선인 제1의 인격자인 김우규(金雨圭)씨가 조합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김우규씨는 1929년 설립된 양양국자조합의 이사이기도 했다.
193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6면 ‘약진 양양의 전모’라는 제목의 양양군 특집판 하단에는 속초항 소재 ‘속초양주소(束草釀酒所)’의 광고가 실렸다.
속초양조장에서 경월소주 생산 유통
수복된 후에도 속초에는 다수의 양조장이 있었다. 1956년 3월 3일자 신문에 <동아일보> 속초지국에서 속초지역업체 전화번호를 신문에 광고로 게재했다. 여기에 속초양조장, 평화양조장, 세기양조장 세 곳이 나온다. 1958년 전국기업체총람에는 속초양조장(대표 이화백, 속초리 2구), 세기양조장(대표 김용기, 속초리 4구)이 나온다. 세기양조장은 이후 낙천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9년 기업체 자료에는 평화양조장이 속초리 476-1에서 소주를 생산했다고 나온다.
제1회 속초통계연감에는 1962년 12월 31일 기준 속초에는 탁주와 소주, 약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이 5개에 종업원은 모두 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960년대에도 속초양조장에서 강릉의 브랜드 소주인 ‘경월’소주를 생산해 유통했다. 1966년 9월 속초양조장에서 용량 미달의 경월 소주를 생산해 유통해 말썽을 빚고 있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1970년 속초에는 양조장 2개에 종업원 23명이 있었으며, 소주와 약주, 탁주를 생산했다. 그러나 이후 속초의 양조장은 대기업 중심의 주류 생산 유통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1970년대 설악산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머루주를 담가 팔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지역 향토술은 없었다.
다시 속초에 양조장이 들어선 것은 2011년 11월. 노학동 이목리마을에 설악프로방스배꽃마을 법인이 설립되어 40도 증류수 소주인 ‘설이소주’와 향토막걸리 ‘속초 생탁’을 제조해 판매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모든 술을 국내산 쌀과 해양심층수로 빚는다. 아직 국내 관광 1번지를 자처하는 속초에 향토 명주가 없다. 지역 양조장에서 관광 속초의 대표 명주가 탄생하기를 희망한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1950년대 속초양조장. 출처 ‘옛 사진으로 엮은 속초의 발자취(2001, 속초시·속초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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